<중국 용경협에서>
백두산?북경 문화탐방기를 쓰려니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릴 수가 없다. 어떻게 시작할까? 어떻게 마무리 할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을까? 아니면 여행지마다 안내 형식으로 적을까? 페이지 량은 어느 정도로 할까?
몇 번을 망설이다 5박 6일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되 탐방지마다 역사와 문화재 내용에 비중을 두고 글을 적을까 한다.
이번 2004년 여름휴가를 보다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8월 4일부터 8월 9일까지 5박 6일간 대구매일신문에서 주최하고 TOUR 114에서 주관하는 북경?백두산 문화탐방에 참여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 그 먼 길을 가서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그러나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천지는 반드시 오르고 가슴으로 느끼고 와야 한다. 반드시 보고 와야 한다. 북경의 문화재도 봐야하지만 그것은 그 다음이었다.
대한민국 이 땅에 태어나서 조국을 사랑했고 이 땅에서 죽는 그날까지 이 땅의 모든 곳을 밟아 봐야한다는 아집으로 국토 곳곳의 여행지와 문화유적지 그리고 우리나라 명산들을 무던히도 밟아 오지 않았던가.
이번 문화탐방은 민족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함께 중국의 수도로서 3천년이 넘는 역사의 고도이며, 만리장성, 이화원, 용경협, 명13릉 중 장릉, 자금성, 천안문 광장 등 세계적인 관광지로 명성이 있는 북경을 찾는 것이었다.
1. 1일차. 8월 4일. 수요일. 비행기 타고 기다리다 지난 하루!
오전 10시.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TOUR 114’ 직원으로부터 여권과 비자를 받고 안내자 및 참가자 30명의 인원 체크 후 12시 출발 북경행 CA 146에 탑승했다. 날씨는 맑았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이었다.
그러나 출발부터 30분 지연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는 북경을 기준으로 하는 중국 표준시간에 맞춰 시계바늘을 한 시간 늦게 돌렸다. 13:00시에 북경 도착 예정이었으나 14:00시에 도착했다. 공항 내에서 매일신문사 직원 부부와 합류했다. 그리고 17:15분. 연길향발 CA 1615편으로 환승하기 위해 수속을 밟을 동안 나는 공항 밖으로 잠시 나왔다. 담배를 한 개비 피우면서.
기후는 대구기온과 비슷하게 더웠다. BMW, 폭스바겐, 가우디, 벤처....... 고급 승용차가 많은 느낌을 받았다. 가끔 현대자동차도 보였다.
17:15분발 비행기는 18:15분이나 되어서 출발했다. ‘1시간 정도의 지연은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라는 가이드의 언급이 머리를 스쳤다. 쓴 웃음을 지었다. 20:00시가 되어서 조선족 자치구인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게 외치면서 따라붙는 조선족 장사꾼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TOUR 114’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기다리는 가이드를 만났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공항 주차장에 대기한 관광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느끼하게만 느껴지는 중국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여산호텔에 객실 배정을 받아 짐을 풀었다. 4성급 호텔이라지만 큰 도시가 아니라서 그런지 대구 주변의 모텔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조선족이 많이 살아서인지 한국의 KBS와 SBS 방송이 TV에 그대로 나오니 견딜만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지치고 비행기만 탄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그래도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내일이면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피곤함을 다 극복할 수 있는 하루였다.
2. 2일차. 8월 5일. 아~ 백두산. 민족의 영산(靈山)이여!
05:00시. 모닝콜을 받기 전에 일어났다. 민족의 靈山이자 聖山인 백두산으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06:00시에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는 호텔 식사였지만 역시 중국음식이었다. 여행기간 동안만 중국음식에 적응하리라 생각하며 조금은 입에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먹었다.
07:00시. 우리는 대기해 있는 관광버스에 탔다. 드디어 白頭山으로 출발이었다. 날씨는 정말 맑았다.
중국인이 할 수 없는 것 3가지가 있단다. 첫째는 지역에 따라 글이 워낙 많아 글을 다 배울 수 없고, 둘째는 지역에 따라 음식마다 특색이 있어 음식을 다 맛볼 수 없고, 셋째는 지역이 워낙 넓어 여행을 다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일정은 엉덩이 뿌리가 빠지는 하루라고 한다. 버스를 워낙 많이 타는 날이라서.
연길!
연길시는 중국 길림성에 속한 연변조선족 자치주 소재지로서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고 한다. 인구 24만명.
연길시에서 백두산까지 거리는 290km. 그것도 고속도로가 아닌 지방도 같은 좁은 도로를 달리니 5시간은 걸렸다. 중간에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한 번 휴게소에 섰다. 휴게소라기보다는 화장실만 이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우리나라 깊은 사찰에나 볼 수 있는 확 트이게 칸막이 된 그런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가게는 산삼과 장뇌삼, 수삼 및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장뇌삼 한 뿌리에 들어갈 때는 3만원 부르다가 조금 지나니 2만원 부르고 버스가 출발하려니 1만원에 싸라고 매달린다. 그것도 덤으로 몇 뿌리를 더 얹어서.
관광버스는 제법 규모가 있는 안도현을 거치고 일제시대에 강주 이주되어 100% 조선족 마을이라는 홍기마을도 지났다.
3륜차가 보이고, 말이 이끄는 달구지가 보이고, 리어커를 앞에 단 자전거가 보이고. 도로 가로수 밑 둥에는 횟 칠을 한 것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해충방지와 수분증발 방지, 그리고 야간에 가로등 역할을 한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70년대 초반 한국의 시골 같은 모습 같았다. 그리고 조선족 자치구는 태어나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중국어는 소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하루에 한 시간씩 배운다고 한다. 가이드는 물론 조선족이었다.
연길시에서 안도현까지는 아스팔트 포장이었고 그 후로는 콘크리트 포장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로, 주변의 건물과 간판, 광고판, 북한에 대해 교육받은 의식이 그대로 보이는 가게점원의 행동과 언어 및 남루한 옷, 차량과 차량도색, 차량 뒤 창문에 크게 흰 색으로 쓴 차량 NO....... 등은 세련되지도 않았고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때 교육받았던 북한 시내 모습 그대로였다. 사회주의라서 그런지 웬지 획일적인 것 같았다. 자본주의와 접목된 북경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주택도 조선족과 한족이 구별된단다. 맛배지붕은 한족! 우진각지붕은 조선족! 세대수는 굴뚝 수와 같고.......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통행세를 내고.
여기까지가 내 핏줄 내 형제의 삶이 있는 만주 벌판이고 연변의 모든 모습이었던가?
11:45분. 우리는 한족이 많이 산다는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화 고려식당에 도착했다. 입구엔 자연휴양지 같은 쭉쭉 뻗은 인공림이 엄청 넓게 심어진 것이 인상적이었고. 마티즈 크기의 3륜 택시와 오토바이 택시가 이색적이었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고려반점의 음식은 그래도 입에 맞기도 했지만 맛도 있었다. 식사 후 우리는 다시 울창한 나무들 사이의 콘크리트 도로를 20여 분간 달리는 동안 길 주위에 3~4km는 족히 될 그 희귀한 미인송의 숲은 무엇과 비유할까? 백두산과 금강산 그리고 시베리아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하며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는 미인송! 그 군락지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를 이름 지을 수 없어 미인송이라 부른다는 그 희귀수종인 미인송! 이 곳이 우리의 산하였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어 지나간 역사의 슬픔을 되새겨 보았다.
12:10분에 백두산 입구인 고도 1,000m 높이의 북파산문(北坡山問)에 도착했다-중국은 문을 중요시 여겨 산 입구에 문을 세워 둠- 매표를 할 동안 기념사진을 한 컷하고 우리는 다시 천지입구로 출발했다. 정면으로 멀리 백두산이 보이는 자작나무와 사스레나무 등의 활엽수가 많은 숲속 도로로 20여 분간 달려 12:35분에 천지입구에 도착했다.
다른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일찍 도착했는지 정상으로 오르는 짚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6명씩 팀을 이루어 짚차를 타자마자 짚차는 무서운 속도로 급경사인 산길을 오르면서 계속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무법천지였다.
5분여간 자작나무가 드문드문 보이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가문비나무와 같이 침엽수로 변해가는 숲을 지나자 고산지대의 넓고 넓은 엄청난 백두산 산세의 자태가 드러났다. 수목생장의 한계선이었다. 정상부근은 수 만평이 육산으로 고산식물이 드문드문 자라는 백두산! 능선이 거의 부석이다. 그래서 백두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렇게 황량한 산기슭을 15여분을 더 달려 13:00시 정각에 백두산 천지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다시 짚차를 타야하는 시간은 30분 후였다.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데 5분! 민족의 영산을 바라보고 느끼고....... 기념촬영시간까지 포함 20분! 다시 내려와서 짚차를 타는데 5분! 더 이상은 허용되지를 않았다. 이틀을 마음조리면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달리고 달려와 우리의 영토!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천지를 느끼는데 단지 20분!!
백두산(白頭山)!
높이 2,749.2m! 2,500m 이상의 16개의 산봉우리 중 우리가 올랐던 봉우리는 2,679m의 천문봉(天文峰)! 이었다. 1년 중 9개월이나 흰눈에 쌓여 있고, 아주 맑은 날이 아니면 천지를 볼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하지만 행운인지 행복인지 운이 좋게도 우리는 맑고 맑은 오늘 천지를 확연하게 그것도 깨끗한 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장백폭포 방향의 대협곡도 두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직 백두산에 올라보고 천지를 반드시 한 번 보겠다고 오지 않았는가? 내년에는 관광이 아닌 서파에서 북파로 백두산 종주를 반드시 오리라. 그리고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구석구석을 내 발로 하나하나 밟아 보리라.
여러 차례의 화산폭발과 함락에 의해 이루어진 칼데라호! 화산활동의 후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백두산은 전체의 총 면적은 8,000평방km로 전라북도와 비슷하며, 수면의 해발고도는 2,189m로 전 세계 화산호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천지 동서의 길이는 3.51km, 남북의 길이는 4.5km 이다. 평균 물 깊이는 200m, 가장 깊은 곳은 384m. 천지의 물은 북쪽 승하차를 따라 일년 내내 장백폭포로 흘러내린다. 천지물의 내원은 지하수가 62%이고, 나머지는 빗물과 눈 녹은 물이다.
이런 백두산을 중국인들은 장백산(張白山)이라고 부르고, 조선족 외에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중국인들은 중국의 5대 명산을 황산! 태산! 아미산! 오지산! 요산!을 꼽고 있다.
13:30분에 다시 타고 온 짚차를 타고 급하게 내려오니 그렇게 많이 기다리는 짚차는 한대도 안보이고 관광객들만 무수히 기다리고 있었다.
14:00시에 다시 천지입구에 도착하여 14:20분에 지근거리에 있는 송화강의 발원지인 장백폭포로 출발. 출발지점에서 장백폭포가 멀리 보인다. 14:40분에 장백폭포 입구에 도착. 15:20분까지 다시 모이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부지런히 장백폭포로 올랐다.
장백폭포!
높이가 68m. 절벽에 흘러내리는 것이 용이 하늘을 나는 것 같다하여 비룡폭포 ‘장백폭포’라고 한다. 대단한 물줄기였다. 그 폭포에서 떨어진 물줄기는 흰 거품을 일으키면 거세게 흘렀다.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지리산의 무재치기 폭포를 떠올린다.
더위와 땀에 찌들은 얼굴을 흘러내리는 물에 씻고 시원한 장백계곡 물에 발 담그며 우리의 산하 끝자락에 내가 있음에 더 없이 행복했지만 한쪽 가슴 깊이 스며드는 슬픔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고 우리 일행 모두가 말없이 느끼는 우리만의 감정이 분명했으리라 믿었다.
사진을 몇 컷하고 다시 입구로 내려왔다. 노천 온천에서 삶은 반숙의 계란을 맛보면서.......
내려오다 보니 노천에서 온천이 솟는다. 조금씩이지만 여기저기 여러 곳에서 솟아난다. 최고 수온이 82도나 된다는데 삶은 계란은 반숙도 덜 된 것 같다.
노천온천욕장이라는 온천에서 우리는 온천욕을 15:40분부터 16:30분까지 했다. 시설은 70년대 한국의 변두리 동네 목욕탕 같았다. 그래도 물은 한국의 유명한 온천보다는 조금은 나은 것 같았다.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었다.
17:00에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백두산 자락에 위치한 산천어 횟집과 흠차를 소개하는 찻집에 들러 차 맛을 보고 18:00시에 숙소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잠시 호텔 로비 밖으로 나왔다.
나뭇가지에 지친 몸을 살포시 기대어 아쉬운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붉게 불태우며 사라져 가는 석양을 넋 잃은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하고 모기와의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는 한국의 뉴스를 보면서 잠들었다.
3. 3일차. 8월 6일. 민족시인 윤 동주와 북녘산하를 마주한 두만강!
05:00시에 서늘한 기분을 느끼며 일어나 짐을 꾸리고 06:00시에 식사를 하고 06:30분에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민족시인 윤 동주가 다니던 대성중학교를 방문하기 위해 연길시에서 17km 정도 떨어진 용정시로의 출발이었다.
또 다시 5시간 동안의 버스여행이었다. 가는 도중 도로가에 있는 피나무 꿀을 파는 가게에 들러 꿀맛을 보고, 조금 후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운영하는 ‘금강산’이라는 상점에 들렀다. 김일성 뺏지를 단 직원들의 안내와 설명에 따라 북한의 관광물품인 자수물품과 청심환 우황환 및 북한 지폐 등에 관해 설명 듣고 그리고 보고.......나는 북한 지폐 100원짜리
한 장을 기념으로 샀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너무 왜소해 보였다. 키도 아주 작고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웬지 같은 민족으로서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30여분 뒤 순전히 사람들이 팠다는 거대한 안도저수지를 차창 밖으로 보면서. 12:00시경. 인구 15만 정도의 용정시 배꽃호텔에서 다시 입맛에 맞지 않는 중국식 식사를 하고 13:00시경에 도로공사 관계로 갈 수 없는 ‘일송정‘을 멀리서 한 번 바라보고, 대구의 신천 보다 못해 보이는 ’드넓은 벌판에 유유히 흐른다는 해란강‘과 용문교를 버스 안에서 지나가면서 한 번 바라보고 윤 동주 시인이 졸업했다는 대성중학교에 도착했다.
용정!
가곡 선구자의 배경도시.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유서 깊은 해란 강변의 도시. 인구 31만명. 대성중학 유적지와 민족이인 윤 동주 생가와 시비. 일송정. 용정우물터가 있는 곳.
13:40분. 대성중학교 내 2층에 전시된 역사관에 올라가니 잘 교육받은 조선족 처녀가 북한 말투로 열심히 대성중학교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나올 때는 방문기념 서명을 하고 장학기금 1만원을 내었다. 잠시 한 위대한 시인의 못다 쓴 글을 아쉬워하며 시비를 훑어보기도 했다.
14:50. 우리는 다시 북한지역이 보이는 두만강을 사이에 둔 북한과 접경지대인 중국 도문시로 출발했다. 일정대로 바로 가는 코스가 아닌 두만강을 따라 북녘을 바라보면서 30여 분간 갈수 있는 코스로 가이드의 제의에 따라 우리는 코스를 변경했다.
두만강 건너 보이는 북한산야는 가파른 산기슭임에도 불구하고 밭으로 변해있었고 나무는 거의 없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집단농장에서는 먹고 살수가 없어 밤에 주민들이 몰래 경작한 것이라고 한다. 군인들도 눈감아 준다고 하고. 그리고 두만강은 더 이상 ‘두만강 푸른물’은 아니었다. 대구의 금호강보다 못한 ‘두만강 오염물’이었다.
도문시 강변공원에 도착하니 두만강 건너편에는 북한의 남양시가 보였다. 두만강과 북한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하고 한참이나 북녘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많은 시간이었다.
15:30분. 우리는 중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세계 제일의 곰 사육장을 방문했다. 2,800여 마리의 반달곰을 사육한다고 그 곳 조선족 안내원이 설명한다.
새끼를 3개월 정도 키워서 추적 장치를 달아 백두산에 풀어주고 5년 정도 지나 다시 잡아들여 곰 쓸개즙을 2년 정도 조금씩 빼고 다시 새끼를 낳게 하고 10살 정도 되면 백두산에 다시 영원히 풀어준다고 한다. 우리는 곰 사육장을 차례로 둘러보고 술에 탄 쓸개즙을 3잔이나 마셨다.
20:00시에 연길공항에서 북경향발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22시에 북경에 도착하니 우리 일행의 가방 한 개가 분실되었다. 북경에 마중 나온 가이드와 'TOUR 114' 직원과 가방 잃어버린 일행이 중국 항공사에 항의하고 찾기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나오니 11시 50분이 지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 내에서 이동한 국내 항공임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분실한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항의가 빗발치고 소란스럽기는 대구의 서문시장 그 자체였다.
한국 사람들이 빨리빨리 해도 이렇지는 않은데, 중국 사람들이 더 빨리 빨리고 시끄럽고 빵빵거리고, 아무 곳에서는 웃통을 벗고, 질서도 없고, 더럽고, 예의도 없고........ 후진국!!
밤 12:30분이 지나서야 숙소인 호텔 같은 호텔. 장원호텔에 도착했다.
4. 4일차. 8월 7일. 명 13번째 장릉과 만리장성 그리고 용경협!
05:30분. 모닝콜 전에 나는 일어났다. 17층 룸에서 커텐을 젖히니 날씨는 잔뜩 흐렸다. 바로 아래에는 체육관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기분은 그런대로 상큼했다.
북경!
3천만년 역사를 가진 중국의 수도. 중국 6대 옛 수도의 하나.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 인구 1400만명. 만리장성, 자금성, 이화원 등 수많은 역사유적지를 갖고 있는 곳이며 중국 제일의 관광도시.
06:30분. 1층 식당에서 식사했다. 양식이었다. 음식은 대체로 입에 익어있는 것들이었다. 맛있게 먹었다.
07:15분. 우리는 투어버스에 타고 08:00시에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옥가공 공장과 판매소에 들렀다. 중국에 오는 모든 관광객들이 중국 정부의 의무적인 관광장소로서 들러야 하는 곳이라 엄청난 차량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우리는 그 곳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전시된 옥으로 만든 물품들을 구경했다. 가격은 엄청났다. 고급팔찌하나는 우리 돈으로 3,500만원 하는 명품도 있었다. 아이쇼핑으로 만족했다.
08:45분. 다시 출발한 버스는 09:05분에 그 유명한 명나라 16명의 황제 중 최후 황제까지 13명의 황제가 묻힌 릉 ‘명 13릉’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13번째 장릉에 도착했다. 이 장릉은 규모면에서 최대최고의 것으로, 영락제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후 자금성을 조영했던 황제이다.
경주의 천마총과는 비교가 안되는 거대한 능이었다. 이때부터 관광객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전쟁!
중국의 천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죽을 때는 병사를 데리고 가 저승에서도 지배하고 싶어 하고, 궁녀들을 데리고 가 천사들을 두고 싶어 하고, 릉 주위에는 복숭아밭을 만들어 릉을 도원으로 만들고 싶어 했나보다. 수많은 병사와 궁녀들을 같이 순장시키고 릉 주위에 복숭아 밭을 만든 것을 보면.......
또한 13릉 비문에는 비문이 없었다. 이유는 영락제가 7세 때 즉위하여 22세 때 릉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유지만, 공적이 너무 많아서 비문에 다 기록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도 한다.
이때 내가 가져온 디지털 카메라는 칩의 용량 한계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256M의 별도 칩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잘 구할 수도 없단다. 할 수 없이 지워야 할 사진은 지우고 다시 남은 일정을 아껴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10:45분. 우리는 또 다시 정부에서 운영하는 화상약과 고약을 개발하는 연구소에 들러 어쩔 수 없는 설명을 듣고 붙여보는 관광으로 오전 시간을 마무리 했다.
12:00시에 점심 식사를 했다. 칠보 전문 백화점인 1층을 두고 2층에서 중국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다음 일정 출발하기 전까지 쇼핑을 했다.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외국인의 관광여행 일정 중 절반은 중국 정부에서 지정한 관광지를 의무적으로 들러야 한다는 것과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쇼핑점을 경유하게끔 정책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국과는 고구려사의 왜곡으로 엄청난 외교문제를 일으키는 중국에 이렇게 많은 한국인이 무엇을 위해 들렀는지 한번쯤 나부터 반성해야 될 것 같았다.
13:20분. 우리는 진시황제가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었다는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인 만리장성으로 출발했다.
만리장성!
14:10분. 우리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인 팔달령(八達?) 만리장성 입구에 도착하여 스카이라인을 타고 정상에 올랐다. 팔달령 장성은 명나라 때 개수된 성벽으로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건축된 축조물이었다.
엄청난 관광객들이 밀리고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보다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길이 6,500km. 비행기 타고도 10시간은 걸리는 길이. 또한 걸어서 산행을 해도 힘든 산 정상! 정상을 잇는 만리장성! 도대체 어떻게 돌들을 나르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려서 만들은 건지? 세계 3대 불가사의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었다.
15:40분. 우리는 북경의 소계림(小桂林)으로 불리는 ‘용경협’으로 향했다. 16:30분에 용경협 주차장에 도착하여 한국의 풍뎅이 차(다마스)와 같은 폐차 직전의 고물 빵차를 타고 매표소까지 갔다. 중국사람 시끄러운 것은 알지만 이렇게 빵빵거리며 급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이 중국인들 같았다. 그것도 웃통을 벗고 씻지도 않았는지 더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떠들어 가면서........운전석 옆에 타고 있는 나 자신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용경협!
높이 100m 정도 되는 댐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댐 위는 어떨까 상상했다. 용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위로 올라가는 통로인 입구. 용의 입으로 들어가서 에스크레이트를 탔다. 계속 이어진 에스크레이트를 얼마나 올랐는지 용꼬리로 나와서 동굴을 지나니 댐 위 유람선 있는 곳에 다다랐다. 협곡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50m 부터 300m 정도 되는 수많은 깎아지른 수직 절벽 봉우리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장관! 장관이었다. 수직절벽에는 이름모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고, ‘신필봉(伸筆峰)’‘금강산(金剛山)’ ‘용경협 강택민’ 이라는 글들도 붉게 선명하게 새겨져 있기도 했다. 유람선을 타고 40여 분간 선경을 감탄하면서 즐겼다.
17:40분. 우리는 하루의 관광일정을 마치고 중국에 관광 오면 반드시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들린다는 발마시지 하러 갔다. 그것도 단체로.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20:00시. 독특한 양념의 북경 최고의 요리라고 하는 오리구이로 식사를 했다. 맛은 역시나였다. 22:00시에 숙소인 장원호텔에 도착했다.
5. 5일차. 8월8일. 천안문광장과 자금성 그리고 이화원!
06:00시에 일어나 07:00시에 1층 식당에서 식사하니 시간적으로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식사 후 담배도 한 개비 피웠다.
07:30분. 세계 최대의 광장으로 6/4 민주화 요구의 중심지인 ‘천안문 광장’으로 출발했다.
천안문광장!
천안문광장 남쪽에 우뚝 솟은 첨탑인 인민영웅기념비 그리고 이 비에는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인민영웅은 영원히 불명이다)라는 모택동의 금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금성의 외문성이기도 한 천안문 성루. 1만 명이 집회를 할 수 있는 크기의 만인대회당이라는 중앙홀을 가진 인민대회당. 천안문광장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중국혁명박물관과 역사박물관. 천안문광장 남쪽 인민영웅기념비 바로 뒤에 있는 모택동 기념관 등 주요한 건물들로 둘러 싸여있는 곳. 면적이 40ha. 100만 명이 동시에 집회할 수 있는 곳. 또한 중국의 상징물이기도 한 곳.
08:10분.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관광객들이 보였다. 천안문 한 가운데에는 모택동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그 위에는 공산당과 농인, 지식인, 공인, 상공인을 상징한다는 붉은 오성기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천안문 바로 앞에는 폭 100m 길이 50km 되는 장님도 운전할 수 있다는 장안도로가 쭉 뻗어 있다.
천안문광장에서 국기 게양하는 과정을 보지 못한 것이 나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는 백두산 다음으로 꼭 한 번은 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우리는 단체로 기념사진을 한 컷을 하고는 천안문 기단에 5개의 통로 중 나는 황제가 드나드는 중앙의 문으로 명?청 황제들이 살던 곳으로 영화 ‘마지막 황제’의 무대인 자금성! 으로 들어섰다.
자금성!
명?청조의 24대 황제의 황궁. 동서 750m. 남북 960m. 면적 72평방km. 방수는 9,999.5칸. 간난 아기가 궁내 방에서 하루 밤씩 자더라도 27살이 된다는 엄청난 숫자이다.
우문(于問), 태화문(太和問), 전삼전인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과 건청전(乾淸殿), 건청문(乾淸問), 후삼궁인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우궁(坤宇宮) 및 어화원(御花園)을 거쳐 10:30분. 이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고궁박물원‘이라고 적힌 자금성 뒷문을 나올 수 있었다.
전삼전에서는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행해지는데 이 일대를 외조라고 불렀다고 하며, 후삼궁은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특히 태화전은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며, 중화전은 1변이 약 28m인 정방형의 건물이고 보화전은 과거 시험을 보던 곳이라고 한다.
기억으로 남는 것은 모든 건물의 지붕은 도자기였고, 자금성 안의 1,043마리의 석재용이 동시에 물을 뿜는다는 것과, 자객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을 17개 층으로 가로 세로 교차로 벽돌을 쌓았다는 것, 그리고 행사 때 엄숙함을 유지하기 위해 새들이 오는 것조차 방지하기 위해 나무가 없다는 것.......그리고 18년 동안 보수 중이라는 것!!
우리나라 문화재도 원상회복을 위해 보수할 때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좀 완벽하게 했으면 좋으련만.......
경복궁하고 나는 한참을 비교해봤다. 규모 이외에는 모든 것이 경복궁이 낫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다음 관광지로 가면서 세 개의 정자가 산의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곳으로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경상공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11:00시에 우리는 또다시 의무적으로 들러야 하는 북경의과대학에 도착했다. 개별로 진맥을 받기도 하고.......
중국의 3대 특산물이라면 도자기! 차! 실크! 라고 했던가?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고는 13: 20분에 ‘경도다박사가‘라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찻집에 들렀다. 차에 대해 30여 분간 설명을 듣고 차도 맛보았다. 관광 2일차 때 들렀던 조선족 찻집과 별 차이가 없었다.
14:00시. 이화원을 향해 출발했다.
이화원!
청나라 황제의 가든 겸 행궁. 150년 동안 건설하여 1,750년에 건조된 최대의 황실 정원이며 서 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곳. 290평방km의 면적을 가진 북경 최대의 공원. 산, 호수, 전각, 전당, 다리, 긴 랑하 들이 조화를 이룬 정원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
14:30분에 이화원에 도착하여 곤명호와 북쪽에 있는 인공의 만수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했다. 이화원의 규모에 놀랍기만 했다. 세계에서 제일 긴 720m 의 장랑을 거쳐 1시간 30여분을 기다려 유람선을 15여분을 타고 반대편에 도착했다.
16:25분에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17:00시에 천단공원을 향했다.
천단공원!
명 청조 황제가 오곡풍양(五穀豊穰)을 하늘의 신에 하늘제를 지내는 곳. 기년전, 황궁우, 원구 등의 고대건물이 직선에 나란히 서 있는 곳.
바깥쪽 4각, 안쪽은 둥근 2중의 담으로 둘러싸인 3층의 원형대리석 단인 원구단, 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셔 둔 황궁우, 3층의 원형 기단 위에 우산을 편 듯한 3층 지붕인 원형 건물인 기년전. 특히 기년전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원형의 목조건물로 천단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남쪽 문에 도착하여 황제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지점인 천심석이 있는 원구단부터 황궁우 및 기년전을 둘러보고는 18:00시에 북쪽 문을 나왔다.
18:20분. 식사를 하고 19:30분에 세계 제일의 중국 서커스-소림사 권법, 훌라 돌리기, 자전거타기, 사다리타기, 촛불 등 여러 가지 묘기와 기예를 볼 수 있는 중국의 전통예술-를 관람하고 21:10분에 숙소에 들어왔다.
중국 여행의 모든 일정이 끝난 것이다.
중국은 뭐든지 거대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구가 많아서일까? 땅덩어리가 넓어서일까? 내가 이번에 탐방한 모든 문화관광지가 그랬다.
역사란 무엇인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6. 6일차. 8월 9일. 마지막 날!
기분이 상큼한 아침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그렇게 편해서 일까? 우리는 07:00시에 식사를 하고, 07: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09:00시에 북경공항에 도착했다.
CA1851편으로 09:50분에 출발해야할 비행기는 10:30분이 넘어서야 청도로 출발하고, 11: 30분이나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리고 청도 공항에서 11:50분발 CA141 비행기는 12:55분이 되어서 대구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는 우리나라 표준시간으로 15:50분이 되어서야 대구공항에 도착했다.
5박 6일 동안의 백두산?북경 문화탐방! 이제는 모두가 그리운 추억이 되어 내 삶과 함께 하리라.
나는 글 잘 쓰는 사람도 아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더더욱 글 쓰는 작가는 아니다. 단지 기록을 남겨 다음 백두산 종주에 대비하려는 마음과 벌써 50이 다되게 살아 기억력도 자꾸만 희미해져 일정표와 메모장을 확인하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실수하게 되는 내 자신이 정말 싫고 잊혀져 가는 추억들이 아쉬워 메모지와 사진들을 펼쳐가며 자료들을 참고삼아 잊혀져 가는 감점들을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 모든 업무 제쳐 두고 글을 완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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