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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기도!

산에나갈련다 2010. 8. 6. 14:29

 

아빠의 기도

 

- 자식은 고통스러워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정말 슬프다. -

 

 

 

2010년 7월 28일 오후 2시. 집사람한테 문자가 들어와 있다. ‘성진이 사고로 부천 성모병원 응급실에 있다’라고. 아들이 무슨 사고로 응급실에 있다는 내용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나뿐인 아들 녀석은 2달째 연락이 안 되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돈이 필요하면 수시로 연락이 왔었는데.

 

다음 날부터 여름휴가임에도 회사 일 때문에 휴가를 가야하나 출근해야 하나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면서도, 설악산 화채능선을 무박으로 산행해야겠다고 계획하면서 즐겁게 업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집사람한테 전화했더니 함께 있는 아들 선배한테 전화 받았다고 하면서 전번을 알려준다. 나는 아들 선배한테 전화해서 몇 가지 물어보았다.

 

언제 어떻게 사고 났나? 지금 상태는? 등등. 그 아들 선배라는 녀석도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연락받고 병원에 가서 바로 집사람 테 전화한 것이 다였다. 알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천 성모병원 원무과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보증금이 필요하단다. 오늘 올라가서 보증금을 바로 계산하겠으니 아들 치료를 지속적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회사에 아들 상황을 얘기하고, 집사람한테 전화해서 집으로 와서 부천 갈 채비를 하고 있으라고 전하고 집으로 향했다. 며칠 묵을 준비물을 챙겨서 3시쯤 바로 승용차로 부천을 향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로 해서 가는데 영동고속도로 여주쯤부터 퇴근 시간과 휴가철이 맞물려 차량이 엄청 밀렸다. 마음은 조급한데....... 그래도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차 안에서 알고 있는 한 대학교 박 교수한테 전화했다. 부천 성모병원에 아는 분 있으면 사고 상황파악을 좀 해달라고.

 

한 참 뒤에 박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벽에 음주상태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어디에 박았다고 하면서 한쪽 신장이 파열되어 치료 중이라고 한다.

 

아~ 한 숨이 나온다. 그렇게 음주하고 운전하지 말라고 했건만,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다 큰놈 말해도 소용이 없고 스스로 알아서 깨우쳐주길 원해 것만. ㅠㅠ. 기어코 큰 사고로 터져버린 것이다. 그래도 가족이고 자식인데 어찌할 것인가? 무사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저녁 7시 40분이 되어서야 부천 성모병원에 도착했다. 야간이라 응급실 원무과에 가서 보증금 입금을 카드로 결재 하고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아들놈! 의식은 있는데 신장이 파열되고 얼굴과 팔 다리 할 것 없이 온몸이 진한 상처투성이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주치의하고 통화를 한다. ‘한 쪽 신장이 파열되었는데 피가 계속 내부에서 흐른다고. 지금은 수술보다 지켜보자고 한다.’ 일단은 상황파악이 덜되었고 또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만큼 알았다고 하고 아들 녀석 얼굴만 바라본다. ‘엄마 아빠 왔으나 아무 생각 말고 괜찮으니 몸 나을 생각만 하라’고 하면서........

 

8시 30분. 면회시간이 끝나자 아들과 함께 있는 선배라는 녀석과 직장 실장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 사고 경위와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해 얘기를 들으면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둘 다 젊디젊은 사람이다. 선배라는 사람은 나이는 선배고 직장에서는 팀장인 아들 아래 부하 직원이라 한다. 실장은 인천지역 지점장격인 실장이라고 한다.

 

아들이 27일 화요일 업무 끝나고 집에 있다 밤늦게 혼자 다시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 잔하고 들어오다 새벽 5시 48분경 부천 조마루 사거리에서 사고 났다는 얘기였다.

 

하늘이 노랗고 멍한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갔다. 엉망이었다. 30평이 조금 넘는 빌라에서 남자들 그것도 총각 둘이서 생활하던 곳이라. 집사람과 먼저 쓸고 닦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리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누웠다. 무지하게 더운 날이었다.

 

8월 29일(목)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 집에 있던 이불과 옷 전부를 집사람이 여러 차례 세탁을 하고, 나는 마루와 방마다 닦고 또 닦았다. 몇 번을 닦아도 시커멓게 닦인다.

 

11시가 되어서 집사람과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면회시간이 12시부터이기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럽게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아들아! 사랑해!’라고 말한다. 집사람은 한 손으로 아들 손을 꼭 잡고 한 손은 물수건으로 아들 얼굴을 살짝 살짝 닦아 준다.

 

아들이 사고로 다친 모든 것이 나 자신 부덕의 소치고 내 탓인 것 같아 죄책감에 빠진다.

 

대학 입학 원서 낼 때 아들 생각대로 두었으면 될 것을 내 고집대로 원서를 교체하는 바람에 경북대학교에 떨어지고 사립대학 경찰행정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들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입학 후 한 학기 동안 공부는 하지 않고 제 멋대로 생활하다 현실도피의 의미로 의경에 자진입대하고 제대 후 복학은 했지만 학교는 거의 가지 않고 다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 한다고 인천으로 와서는 이렇게 지내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미래를 책임질 수도 없고.......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원 치료비를 준비하고, 옆에 있어주고, 제발 빨리 완쾌해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무력감!

 

면회 후 특진을 하는 담당 교수인 비뇨기과 과장을 찾아뵙고 아들의 지금 상황과 향후 진료 방향에 대해서 묻는다.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하지만 결론은 수술보다 파열되었더라도 남아 있는 신장을 살리기 위해 좀 더 두고 보자고 한다.

 

진단검사의학과 실장을 찾아간다. 박 종석 교수의 지인이다. 두 가지 부탁을 한다. 하나는 진료비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과, 아들이 입원실에 올라갔을 때 종일 있어야 하기에 오후에 2시간 밖에 해결해주시 않는 병원 주차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다.

 

다시 아들이 있던 집으로 간다. 종일 오토바이 교통사고 처리 해결 방안과 사고 지점과 사고 경위 확인, 부서진 오토바이 행방을 찾는 문제. 그리고 회사 일을 생각한다.

 

저녁 8시에 다시 중환자실에 아들을 면회한다. 주치의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오르락내리락 한다면서 수혈을 해야 한다고 한다. 또 폐도 많이 다쳐 물이 찬다고 하고, 그래서 CT 촬영과 조영술을 삽입하고 혈전이 생기는 안 생기나 지켜봐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몇 장의 내용물을 주면서 사인을 하라고 한다.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닌 몇 가지 내용에 대해 전부 사인을 하라고 한다. 의사가 아닌 나로서는 사인을 할 수 밖에 없다. 오직 아들을 살려야 하니깐. 해달라는 것 다 해드릴 것이니 아들만 살려달라고 마음속으로 부탁한다.

 

아들은 의식이 뚜렷하지만 신장 파열과 다른 다친 곳에 대한 아픔을 고통스러워한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 언제 수술할지 모르니 음식과 물까지 금해 먹지 못해 배가 고파 고통스럽고, 허리를 안정시켜야 한다니 꼼짝 못하게 못 움직이고 바른 자세로 2주 정도는 있어야 하니 더욱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영양제 주사를 주고 독한 약과 주사를 맞기도 하지만 신장이 파열된 곳으로부터 피가 소변을 통해서 계속 나온다.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리. 냉정하게 판단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녁 9시가 넘어서 원미경찰서로 간다. 어제부터 기다리다 오늘 야간에 출근하는 사고 조사관을 만나서 사고 경위를 물어본다. 사건 사진들을 보여주며 음주상태로 운전하다 조마루 사거리에서 인도위로 돌진하여 일어난 사고란다.

 

나는 다친 상대방이 없는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음주수치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음주라니? 채혈해서 국과수에 의뢰한 상태인데....... 병원도 경찰도 음주를 단정적으로 말하다니? 참!

일단 잘 부탁드린다고 하고선 아들이 머물던 집으로 간다.

 

7월 30일(금)

아침 10시경 나는 사고 난 지점인 조마루 사거리를 향한다. 경찰 조사관이 말한 사고 지점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사고 날 지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음주를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럼 누군가 뒤에서나 옆에서 오토바이를 박거나 위협을 가했다면? 아들은 그 순간 아무 기억도 못하는데. 경찰조사관에게 전화를 한다.

‘조사관님! 내가 경찰이나 수사관은 아니더라도 제가 아무리 그 지점을 살펴봐도 혼자 사고 날 지점은 아니 것 같습니다. 뺑소니나 아니면 뒤나 옆에서 겁을 줘서 난 사고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조사 부탁드립니다.’ 했더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러겠다고 한다.

 

그런데 음주 사고로 단정지어버리다니. 그러니 병원도 아들 선배라는 녀석도 모두가 음주 사고로 알고 있다. 단지 중환자실 한 간호사만이 뺑소니의 여지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아프다.

 

다시 병원 중환자실로 향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들과 짧은 30분간의 면회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때까지 못한 대화를 한다. 아들은 잠깐 잠깐 잠을 자는데 악몽을 꾼단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악몽까지.......

 

사고 다음날 입원실로 올라갈 것으로 알았는데 계속적인 CT촬영과 여러 가지 상황체크로 인해 중환자실에 있어야 한단다. 상황이 호전되다가도 악화되기를 반복한단다.

 

형님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한다. 그런데 눈물이 왈칵 나올려 한다. 하나 뿐인 아들을 잘 못 키운 탓 이런가 한다. 서러움이 쏟아진다.

 

평생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느 누구한테도 나쁜 짓 한 적 없고, 비겁하게 살아 온 적 없고, 죄 지은 적 없고, 성실하고 열심히 바르게 직장생활 하면서 오늘날까지 떳떳하게 살아왔는데.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을 거치고 현재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힘들게 살지도 않았는데.......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작년에 내가 두 번이나 교통사고로 다치고, 이번에 아들까지.

 

면회를 마치고 집사람과 식사를 하고 아들이 머물던 집에서 다시 생각에 빠진다. 아들에게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욕심 없이 건강하게 행복하게 바르게 살자‘ 라고 말해주어야겠다고. 그러면서 내일 원무과에서 입원비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저녁 8시에 다시 중환자실에 면회를 한다. 서울에 있는 막내 동생이 제수씨와 함께 왔다. 하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조카가 다쳤으니 의무적으로 걱정이 되어서 왔을 뿐이다. 그래도 상대방 입장에서 고마울 뿐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말 피곤하다.

 

면회 후 동생네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무지 더운 날씨다. 소나기나 한줄기 내렸으면 좋으련만....... 식사 후 그냥 헤어져 집으로 온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아들이 이렇게 중환자실에 고통스럽게 누웠는데 내가 뭘 한단 말인가? 아니 뭘 할 수가 있단 말인가?

 

7월 31일(토)

새벽에 시원하게 비가 내린다. 아픈 가슴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오전 10시경 경찰조사관이 알려준 오토바이 상회로 간다. 그런데 문이 잠겼다. 전화를 했더니 자기는 그런 오토바이를 싣고 온 적이 없다고 한다.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다.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병원 원무과를 들러 입원비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더니 담당자가 월요일 되어야 출근한단다. 토 일요일은 뭐가 되는 게 없다.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내일이면 나는 대구로 가서 월요일부터는 회사 출근은 해야 하는데........

 

일단 병원 중환자실로 향한다. 아들 면회시간이기에. 모습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그런데 CT를 촬영해야 한다면서 영상의학과로 아들을 싣고 간다.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 옆에 있어주고 따라가고.......아들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는지?

 

다시 생각한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래 오전까지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병원도 조용한 토요일 오후 8시. 나와 집사람은 정해진 의무이고 규칙처럼 중환자실로 들어간다. 말없이 아들 손을 조용히 잡아본다. 마음 편히 나을 것만 생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엄마한테 걱정 끼치는 행동은 그만하고 엄마를 위하는 자식이 되어 달라고 농담 삼아 말한다. 아들은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고맙게 생각한다.

 

아들이 머물던 집에 있으니 친구들과 누나한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오는 전화에 답변하는 것조차 싫어진다. 궁금하고 걱정되어서 하는 전화이겠지만 똑 같은 답변과 아들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 어떻게 도움 될 것도 아니고 우리 가정의 속을 다 보이는 것이 싫어 고맙다고 건성으로 답하고는 끊는다.

 

8월 1일(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집안을 청소하고 조용히 쉬면서 11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컴퓨터로 회사업무 결재할 것 하고 전화로 업무 상황을 점검하고 진행하는 일들을 부탁한다.

 

11시가 되어 집사람과 다시 병원으로 나선다. 중환자실 아들 면회한다. 아직도 많이 고통스러워한다. 폐에 물이 찬단다. 혈압이 올라간단다. 신장에 다른 혈관에서 지속적으로 피가 나온단다. 다행히 혈전은 생기지 않는단다. 6일 동안 아들의 차도는 없다. 계속 지켜봐야 하는 상황! 불안한 상황이 지속될 뿐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홈플러스 여월점에 들린다. 그런데 경찰 조사관한테서 전화가 온다. 오토바이상회의 전화번호를 다시 알려준다. 나는 바로 네비게이션으로 검색을 해서 찾아간다. 부서진 오토바이를 살펴본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크게 부서지지 않은 것 같은데 주인은 왕창 부서졌단다. 엄청 크게 박은 것 같단다. 그래서 탄 사람이 크게 다쳤을 것이란다. 그런가? 그래서 수리비가 200만 원 정도 될 것이니 폐차시키란다. 폐차시킬 서류를 달란다. ㅠㅠ.

 

일단 알았다고 하고선 홈플러스에 들러 반찬과 과일을 산 집사람을 태우고 아들이 머물던 집으로 향한다.

 

5일 만에 간단하나마 집사람과 처음으로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 그리고 과일도 좀 먹어본다. 그런데 고통 받는 아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여 넘어가질 않는다.

 

회사에 전화를 한다. 월요일까지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3일인 화요일은 출근하겠다고.

 

8월 2일(월)

부천에 올라온 지 벌써 6일째다. 그런데 아들의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다. 변한 게 없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빨리 10시 30분경에 집을 나서 부천 성모병원 원무과로 향한다. 원무과 자동차 담당 대리를 만나 진료비를 상의 한 후, 의료보험으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다시 진단검사의학과 실장한테 다시 한 번 부탁한다. 진료비 문제를.......

 

그리고 중환자실로 향한다. 매일 그러하듯 오늘도 30여분 일찍 도착해서 내 외과 중환자실 앞에서 초조하게 면회시간을 힘없이 기다린다.

 

12시가 되면 차인벨이 울리고 방송으로 기도하고 그러고는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젊은 사람이 나와 중환자실의 면회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환자 이름을 호명하면 보호자가 들어간다.

 

아들아!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편안하게 다친 곳 나을 생각만 해다오. 그리고 힘내고 이겨내 다오. 넌 건강하고 의지가 강하니 분명히 빨리 치유될 것이다. 이 고통을 조금만 참고 이겨내자. 나 혼자의 독백처럼 아들에게 나직하게 말한다.

 

짧은 면회시간 30분. 나는 대구로 출발해야 하기에 혼자서 뭐든 잘 할 수 없는 집사람을 아들이 머물던 집에 안쓰럽게 바래다주고 나는 부천을 떠난다. 다음 주 토요일 올라 올 것을 생각하며.........

 

아들은 아들대로 잘 이겨내기를 바라고,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타지에서 혼자 아들에게 용기를 주며 잘 지켜주길 바라고, 나는 나대로 가장으로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회사 일도 집안일도 잘 이끌어 가야할 것이기에........

 

8월 6일(금).

어제까지 아들을 지켜보던 의료진이 드디어 조형술로 혈관을 막는단다. 그러더니 혈관이 너무 많이 터져 한 쪽 신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한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치유되고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야 할 터인데........

 

오! 하느님!

 

 

                                                                                             2010년 8월 7일.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